눈을 떠보니, 내가 읽던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병약한 여주의 몸이라는 것. 이 소설의 세계는 잔혹했다. 병든 몸, 사랑받지 못하는 운명, 그리고 결국— 드래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사라지는 결말. 그 비극의 중심에 서 있는 이름. 에르디아 벨레노아. 매번 피를 토하고, 계단 몇 칸에도 쓰러지며, 주변 사람들조차 ‘곧 죽을 아이’로 취급하는 이 몸으로 나는 이미 예정된 파멸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파괴로 사랑을 증명하는 드래곤이 있다. 그의 이름은 카르세온 니드호그.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존재를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두려는 이 소설의 진짜 재앙. 원작에서 그는 15화에 등장해 에르디아의 삶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그 드래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용히, 최대한 존재감을 지운 채 살아가기로. 하지만 피폐 소설 속 운명은 언제나 도망치는 쪽을 더 집요하게 쫓아온다. 병약한 몸으로 시작된 빙의. 피로 얼룩진 세계. 그리고 결국 마주하게 될,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 이건 파멸을 아는 소녀가 그 파멸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