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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존재가 파국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슬픈 일대기

ventimilk 2025-06-14 14:47:49 『약점』, 한 존재가 파국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슬픈 일대기 빛은 어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비춘다. 어둠은 빛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숨긴다. 그리고 둘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 도무지 섞일 수 없는 그 둘이 부딪히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된다. 『약점』은 바로 그 불가해한 충돌 지점에서 탄생한 서사다. 이 소설은 단순한 청춘 로맨스도, 일탈의 고백도 아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끝없이 누락되고 삭제되는 감정들, 부정된 존재들의 궤적을 더듬으며, 인간의 ‘결핍된 감정’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호출한다. 정상일. 그는 선하고, 똑똑하며, 모범적이다. 청년부 회장이고, 이중 전공자이며, 봉사 활동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틈새마다 균열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매끈하지만, 내면은 천천히 침식되고 있다. BPD,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진단명은 단순한 라벨이 아니다. 이 소설은 병명을 주인공에게 덧씌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병명의 본질이 무엇을 결핍하고자 했는가를 집요하게 해명해낸다. 그 결핍은 바로 ‘애정’이며,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니까 정상일이 민재승을 만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명을 향한 절박한 외침이었고, 살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외로움, 그것이 처음엔 친구라는 이름을 빌렸고, 곧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며, 어느 누구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민재승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지배하고 싶었다. 통제하고, 갖고, 압도하고 싶었다. 정상일의 사랑은 점점 '윤리의 이탈선'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는 민재승의 계정을 추적하고, 사적인 영역을 침범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일련의 행위들을 비난하거나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정상일의 절박함에 조금씩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 절박함은 때로는 증오로, 때로는 광기로, 때로는 자기기만으로 변화해간다. 마치 자기를 해치지 않고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건은 점점 더 비극적으로 전개된다. 정상일은 또 다른 만남 사이트에서 ‘수호천사’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이 만남은 강제와 폭력, 트라우마로 귀결된다. 인간의 존엄이 뭉개지고, 피가 흐르고, 그로 인해 생긴 멍 자국은 곧 ‘복수’라는 새로운 감정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은 오히려, 민재승이다.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감정의 화살표는 늘 한 곳을 향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원망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히 피해자가 괴물이 되어가는 서사가 아니다. 『약점』은 정상일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외부적으로도 폭력적이었는지를 끈질기게 보여준다. 부모의 무관심, 친구들의 위선, 종교의 억압, 사회적 이상에 대한 강요. 그 모든 것들이 정상일을 ‘착한 아이’로 만들었고, 결국 그 착함은 그를 무너뜨리는 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비명을 지르기보다, 웃는다. 이 작품의 특별함은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흐릿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7화의 악몽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감정의 회로가 과열되어 터져버린 하나의 ‘정신적 붕괴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자살, 경찰, 수갑, 어머니의 절망, 모든 사회적 타자가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정상일의 무력감에 고스란히 동화된다. 그리고 눈을 떠보면,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함과 동시에 소름이 끼친다. 왜냐하면, 그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수상소식이 들린다. 『공백의 시간』이라는 단편으로, 그는 대상 수상자가 된다. 그러나 이 수상은 결코 희망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상일이라는 존재를 문학적 ‘공백’으로 선언하는 순간이다. 심사평에 적힌 “우리 시대의 내면”이라는 문구는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그런 내면을 끝까지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공백의 시간』이라는 제목은 곧 『약점』이라는 이 소설 전체의 주제를 꿰뚫는 상징어가 된다. 이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없는 자, 보고도 외면된 자, 들려도 이해받지 못한 자들의 서사다. 그러니 『약점』은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한 인간의 고백록"이다. 고백은 때로는 자기연민이고, 때로는 타인에 대한 복수이고, 또 때로는 사랑에 대한 집착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 감정의 궤적을 기계적인 선형 구조가 아닌, 파편화된 내면의 흐름 속에서 풀어간다. 마치, 정상일이라는 한 인간을 해부하는 해설서처럼. 『약점』은 감정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펼쳐놓는다. 그래서 독자는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불편해지고, 슬퍼지고,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사랑이, 누군가에겐 외로움이, 누군가에겐 죄책감이. 그리고 때로는, 약점이야말로 한 존재를 가장 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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