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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컨디션이 단편집을 쓰라 하셨다

어중간한 인간 2025-10-26 12:23:24 단편집.7 오늘도 큰 나무가 그려진 나무 가면을 끼고 오두막을 나와 지정된 루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간다. 오두막에서 내려와 마을로 걸어가면 모든 사람이 여러 그림이 그려진 나무 가면을 낀 채 매일 같은 루트로 움직이고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모두 코딩이 된 듯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루트를 통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나도 그렇게 매일을 반복한다. 내가 쓰던 가면을 책상에 두고 침대에 누워 다음 날을 기다린다. 밤에는 아무도 마을로 나가지 않는다. '내가 왜 이곳에 왔더라…' 몇 년 전, 어느 날 친구들과 캠핑을 가던 중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이 오두막에 떨어졌다. 네 명의 친구와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띈 건 백골의 시신 한 구.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나무가 그려진 나무 가면뿐이었다. 책상에 올려진 일기에는 이곳의 룰이 적혀 있었다. 1.가면을 쓰고 가면에 맞는 루트를 따라 이동해라. 2.어떤 일이 있어도 루트를 벗어나지 말 것. 3.인간이 그려진 가면은 관리자이니 보여도 없는 척할 것. 4.가면은 무조건— 4번을 적던 도중 지운 듯 검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일기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상한 곳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안일했다. 그저 장난인 줄 알고 오두막을 나갔다. 나만이 장난삼아 가면을 끼고 마을로 걸어갔고, 결과는 마을에 있던 존재들이 내 친구들을 모두 밟아 죽였다. 뜨거운 피가 내 손에 튀고 옷에 묻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일제히 가면을 쓴 나를 바라보며 다가왔고, 나는 공포감에 나도 모르게 가면이 지시한 루트를 따라 걸었다. 그제야 존재들이 자신의 루트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그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내가 친구들을 잃고 이 세계를 살아가며 알아낸 것은 여기에 가면을 쓴 모든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괴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곳을 살아가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다. 내 오두막에서 일기를 적었던 존재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나와 다르게 공포감에 사로잡혀 굶어 죽은 듯했다. 그의 일기는 우리가 본 앞면뿐만이 아니라 뒷면에도 검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주의 사항부터 이 가면에 맞는 루트에서 살 수 있는 음식, 꼭 인사해야 하는 존재들. 심지어는 가면을 쓰고 자야 하는 날까지 적혀 있었다. "10명…." 이 일기에 글을 적은 사람은 총 10명이다. 아마 굶어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잡아먹히거나 실종된 듯 일기가 적혀 있다가 만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그럼에도 10명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일기를 쓸 때 맨 위에 이름을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부터 독일, 일본,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잡혀 온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글씨는 내가 잘 아는 한국어로 보였다. '후… 내일인가.' 다음 날은 가면을 쓰고 자야 하는 날. 그날은 나무처럼 서서 버텨야 했다. 지금까지 살아간 1년 동안 걸린 적은 없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미리 구비해 둔 석궁을 가장 가까운 침대 밑에 숨겨 놓았다. '차근차근 모아서 만든 건데, 성능은… 장담 못하겠지.' 조잡하게 만들어진 석궁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혀에 뜨거운 피가 닿으며 비릿한 철맛이 났지만,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도 좋은 듯했다. 밤은 길다. 그러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좋기에 석궁을 조금 만지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밝고 따뜻한 태양 빛과 별개로 나는 다시 가면을 끼고 천천히 내가 매번 가던 길을 걸어갔다. 매번 똑같은 가면 쓴 괴물에게 인사하고 내 루트에서 살 수 있는 음식인 당근을 네 개 구매하고 마을을 세 바퀴 돌고 해가 저물면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후… 오늘인가…' 하늘이 검게 물들어 가며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건드렸다. 나는 자리에 서서 가면을 쓴 채 잠을 청한다. 오늘은 관리자가 와서 불시 검문을 하는 날이므로, 서서 자는 척해야 한다. 어느 시간대에 찾아올지 모르기에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서 있어야 한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내가 바로 잡을 수 있게 석궁도 장전시켜 놓은 채 뒤에 두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예전과 다르게 조금 여유롭게 서 있는데 저벅저벅 내 오두막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관리자— 아니, 관리자가 아닌 푸른 나방이 그려진 가면을 쓴 존재였다. 예상과 다른 존재의 등장에 잠시 당황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식은땀이 흐르고 뒷짐 진 손이 덜덜 떨렸다. 예상 외의 상황은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기 딱 좋은 일이다. '쏴야 하나. 아니면 관리자의 농간? 젠장, 굴러라 머리야!' 만약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며 최악부터 최고, 최선의 미래까지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그때 그 존재가 가면을 벗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맛나 나무를 먹을 시간! 으흐흐흐." 분명 갈색 정장을 입은 깔끔한 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가면을 벗자 나방처럼 생긴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징그럽게 생긴 입에서 초록색 침이 떨어지며 그 존재가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젠장, 망했다.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존재들이 해봤자 사이코패스이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런 수준의 존재들이 아니라 완전한 외부의 존재. 그 존재의 등에는 푸른 벌레 날개와 검고 얇은 손에는 털이 자라 있었다. 손이 떨려오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변수는 좋지 않다. 지금처럼 조금의 변수에도 몸이 굳고 머리가 하얘진다. 그리고 손은 물에 씻은 듯 축축하고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젠장! 젠장! 젠장!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이 상황을 넘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관리자가 오길 기다릴까? 아니다. 관리자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지금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데 기다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석궁으로 쏴 볼까? 석궁의 위력이 저 괴물을 잡을 정도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현재 내 오두막에서 당장 잡아서 쓸 수 있는 물건은? '당근, 석궁, 베개가 끝인가. 주머니에 있는 건 작은 핀.' 그런데 저 괴물의 날개, 이상하게 펼쳐져 있다. '저 특징은 나방… 그렇다면!' 시야를 밝혀주는 램프가 내 책상 위에 있던 것을 떠올렸다. 침대와 램프까지의 거리는 대략 3미터 정도. 몸을 빠르게 숙여서 움직이면 조금의 틈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괴물의 동체 시력이 얼마나 빠른지 난 모른다. 만약에 내 예상대로 나방이 맞다면 내가 살짝 움직이는 순간 나를 죽일 수도 있다. 반대로 놀라서 뒷걸음질 칠지도 모른다. '후자에 걸어볼 수밖에 없는 건가…?' 머리가 빠르게 식으며 주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괴물이 내 머리를 손으로 잡으려 한다. 지금 내가 몸을 숙여 움직인다면 괴물은 놀라서 뒷걸음질 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머리에 괴물의 털이 살짝 닿는 그 순간, 몸을 빠르게 웅크려 앉은 뒤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며 챙긴 램프에 불을 빠르게 붙였다. 내가 책상 밑에 들어간 걸 확인한 괴물이 날 잡기 위해 손을 뻗는 그때, 램프를 괴물의 옆으로 던졌다. 나방은 빛을 보며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긴다. 그때가 나의 한 수. 책상 밑으로 도망치며 챙긴 또 하나의 물건인 석궁을 들고 괴물의 얼굴을 조준하고 쏘았다. "끄아아아아아!" 괴물의 왼쪽 눈에 정확히 맞았고, 침대로 기어가 밑에 숨겨 둔 화살을 꺼내 다시 장전한다. 그때 괴물이 내 목을 붙잡고 씩씩대며 피와 침이 섞인 입으로 말했다. "이 개 같은 나무 새끼가!!!!!!" "컥…" 힘이 너무 강하다. 조금 더 힘을 주면 내 목이 꽃을 꺾듯 톡 떨어진다. '그… 전에!' 화살을 한 번 더 쏴 오른쪽 눈을 맞추었고, 고통에 날 놓친 괴물을 난 바라보았다. "죽어!!!!" 괴물에게 빠르게 다가가 다리를 걸어 덮쳤다. 그리고 눈에 꽂힌 화살을 뽑아서 그 더러운 입에 꽂아 넣었다. "죽어! 죽어! 죽어!!!!!" 오두막 바닥에 초록색 피와 침이 튀어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다. '빌어먹을…' 가면 에 묻은 피를 팔로 닦으며 죽어가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정말 쓰레기 같은 곳이다. 존재하지도 않을 생물. 이걸로 확실해졌다. 여기는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지만,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고 확신되는 동시에 돌아갈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그때 아직 죽지 않았던 괴물이 피를 뿜으며 웃어댔다. "푸흐흐흐흐흐." 나는 아직 안 죽은 괴물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도나 피를 흘렸는데 살아 있다고…?' 조용히 괴물을 바라보는데, 괴물이 녹아내리며 징그러운 눈을 찡그렸다. "너, 이곳 존재가 아니구나! 아니었던 거야. 아니었어. 아니었던 거지? 크흐흐흐흐흐." 입술을 깨물며 몰려오는 공포감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사라져가는 괴물에게 물어보았다. "넌 누구고… 여긴 어디지?"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숨기며 괴물을 쳐다보았다. 괴물은 가면을 떨리는 손으로 잡아서 내게 건네며 더러운 입으로 씩 미소 지었다. "그건… 알게 될 거다… 인간." "뭐라…?" "크흐흐흐흐흐흐흐흐흐." 내가 가면을 받자 여섯 개의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웃었다. 잠시 뒤 갑자기 시체는 사라지고 아침이 밝았다. 오두막 바닥과 벽에 흥건히 튀어 있던 괴물의 피는 깔끔하게 사라져 어제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런 젠장…" 물리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이 상황에 가면을 벗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곤함은 느껴진다. 어제 분명 괴물과 싸웠고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데 오두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하고 이질감도 없다. 딱 하나 이질감이 있는 건 괴물이 내게 건넨 가면 하나. '푸른 나방이 그려진 나무 가면… 아까 그 괴물도 나방을 닮았었는데…' 머릿속에 어떠한 이론이 떠올랐고 확인을 하기 위해 나무가 그려진 가면을 끼고 마을로 걸어갔다. 매번 가던 루트, 똑같이 인사하던 존재들과 같은 길을 걸어 다니는 모든 존재들. 내가 다니는 루트에서 보이는 존재들의 가면에 그려진 그림을 모두 확인하며 길을 걸어 다녔다. 날은 저물어가고 오두막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앉아 내 이론을 떠올려보았다. '가면에 그려진 그림은 그 존재의 원형을 의미하는 건가…?' 오늘 가면에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며 사자, 메뚜기, 나비, 톱니바퀴, 파리, 새 등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봤다. 확인한 건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모든 가면에는 그들의 원형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내가 쓰고 다니는 가면의 존재의 원형은 나무라는 것이다. '내 이론이 맞다는 가정하에지만…' 그때 문득 다른 가면을 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가면을 쓰면… 새 루트로 이동이 가능할까?" 존재별로 다른 루트가 있기에 마을을 더욱 돌아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루트를 다니면서 파란 나방의 가면은 본 적이 없었다. '완전히 다른 루트라면…!' 파란 나방이 그려진 가면을 들고 얼굴에 가까이 댔다. 그러자 강한 고통이 느껴지며 얼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에 내 기억이 아닌 그 괴물의 기억이 들어왔다. 괴물이 다녔던 루트와 인사했던 존재들, 그리고 특정한 밤마다 나무 가면의 집에 찾아와 잡아먹었다는 사실도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래… 일기 속에서 찾아온다는 건 관리자가 아니라 이 괴물이었던 거야…' 나방은 수액을 먹는다. 만약 다른 존재들이 내 이론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먹이사슬이 구현되어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살아남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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