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구하고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데 돌아온 건 배신과 봉인이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 갇혀 사명의 의미도 잃고 전부 포기했을 때쯤 무슨 장난인지 밖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미 500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이미 세상은 많이 변했고 나의 모든 업적은 배신자의 공로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을 구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어디 깊은 숲에 숨어 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봉인되던 날 밤, 날 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적들을 향해 몸을 던진 남자와 무척이나 닮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결혼 반지를 들고서. “이런, 신혼인 두 사람을 내가 방해했군.”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웃으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15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점잖은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황태자를 밖으로 내보낸 리히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들어온 게 무색하게 울상을 지으며 내 무릎에 엎드렸다. “왜 전 불러주지 않으신거에요.” “그야 넌 바쁘잖아.” “당신과 대화할 시간은 만들수 있어요. 그러니 저도 예뻐해주세요.” 옷자락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린 리히트는 투정부렸다. 얘 처음 만났을 땐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변했지. 하지만 밀어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듯 했다. 바람빠진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자연스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고개를 든 리히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래도 이런 걸 하는 건 너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