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딸이란 소문이 돌아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면 된다. 가난하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침묵으로 만든 아늑한 지서의 세상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깨지기 시작했다. ‘진짜’인 신재언을 만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것을 가진 신재언에겐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지 모른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신재언과 엮이지 않으려 했는데. “……비밀 유지도 되는 건가요? 학교에는 소문나지 않았으면 해서요.” 한 달에 100만 원이라는 조건에 재언의 과외를 거절하지 못한 지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내가 싫어?” “아니.” “그럼…… 좋긴 해?” “……아니.” 제 마음을 온전히 보이는 재언과 달리 솔직할 수 없는 지서. “왜 이렇게 머리를 못 써. 내가 너라면, 사귀어 주는 척하고 과외비 두 배는 받겠다.” “…….” “왜 그걸 못 해. 그게 뭐 어렵다고.” 끝내, 재언의 곁에서 도망친 지서. 12년 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와 재회하게 되는데. “……지서야. 아무래도 아직 안 끝난 것 같아, 나는.” 묻어 놓은 추억이 흘러나와 일렁거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