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사장님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이서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당신 입으로 직접 그랬잖아.” “…….”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말을 뱉는데, 이상하게 목 한구석이 시큰했다. 설마 기대했던 걸까. 이런 순간까지도, 이 남자에게 특별해지기를. “맞아, 그 어떤 것도 아니지.” 침묵하던 재열이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서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가끔은 그래서…….” 착각일까. 문득 그에게서 희미한 분노가 느껴진 건. 확인할 새도 없이 그가 거칠게 숨결을 앗아갔다. 양팔을 강렬히 내리누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이서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도 넌 네 역할을 다해야지.” “…….” “네 본분을 잊지 말아야지.” 감정 쓰레기통. 혹은 장난감보다 못한 존재.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오직 하나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감히 품었다는 것. 하지만 이제는 단념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시작한 이 사랑을, 이 밀회를. 제 손으로 끝내야 할 때였다. * 여자가 떠난 뒤에야 재열은 깨달았다. 채이서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했던 여자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