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망받아도 괜찮아.’ 십 년 전 선황제의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풍비박산 난 해씨 가문의 막내딸 정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버린 이 나라, 효국을 용서할 수 없었다. 피 끓는 감정의 분풀이를 덜컥 일생의 목표로 삼아 버렸다. “저는 이승학입니다.” 지독한 복수의 첫 발을 떼던 날 지친 모습을 들킨 건 우연히 비를 피해 온 귀공자였다. 그에게서 따뜻하게 데운 귀주머니를 받았다. “기다렸습니다. 사는 곳을 알려 주면 돌려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맑고 고요한, 티끌도 오점도 없는 남자였다. 저리 고고하니 혼탁한 자신과는 결코 섞일 수 없으리라. 따뜻함이 전해진 순간 정윤은 그와의 후일을 기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요?” “소저가 왜 폐하의 곁으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와는 정말로 섞일 수 없는가? 그는 진실로 얼룩 한 점 없는 자인가? 아니면 어느새 제게 더럽혀졌는가. 그도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되고자 하는가. “함께한 대가라면 저는 죄를 지어도…… 좋습니다.” 마음이 깊으면 무엇이든 해 주지 못할 게 없다 하더니. * 본 작품은 백승림 작가님의 <등꽃비담>, <수국기담>의 연작입니다.